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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방파제 벽 너머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바다의 파도와 그 앞에서 한 연인이 정열적인 살사를 추고 있는 모습의 사진은 당시 대학생이던 기자가 과감히 휴학신청서를 내고 은행 청원경찰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 여행 경비를 마련해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여인이 춤추고 있는 쿠바 아바나의 바다로.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던 체 게바라가 열정을 바쳤던 곳.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던 곳, 열정과 낭만의 나라. 쿠바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 먼 곳에 우리나라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천항에서 멕시코로 가는 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실어야 했던 조선인들의 사연은 애틋함을 넘어 가슴속 꿈틀거림을 줬다.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에 도착한 조상들은 금의환향할 그날을 생각하며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했지만, 결국 농장이 망하자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고국이 아닌 쿠바 사탕수수밭으로 가야 했다.
김이수(49) 한쿠바교류협회 대표는 아직 수교도 제대로 맺지 않은 쿠바를 드나들며, 도시농업·의료복지·문화 교류사업을 비롯해 한인동포 지원사업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동포들이 살고 있고, 6.25 당시270만 달러를 지원한 나라이기도 한 쿠바와 한국의 정식 수교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평생에 꼭 가고 싶던 쿠바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당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해변가에서 춤추는 여인은 아니지만, 왠지 그를 통해 아바나의 여인을 만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와 여행방법에 대해 많이 물어보려 했던 기자의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스로를 ‘돌팔이 의사’라고 부르는 그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모습은 해변의 여인이 아닌 덩치 좋은 쿠바의 한국인 의사였다.
“공공의료는 빗물이다. 우리가 빗물을 통해 농사를 지으면서 돈을 지불해야 하나? 빗물처럼 공공의료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홍익인간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만 잘 사면 돼’라고 외치고 있다. 공공의료는 한 국가의 운명의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생명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 아닌가. 공공의료기관은 이 사회에서 버틸 수 없는 사람과 터전이 없어진 사람에게 피난처와 같다. 그 사람들에게 패자부활전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다. 그곳마저 없애겠다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
그가 이처럼 공공의료에 대해서 역설을 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가슴 아픈 유년시절까지 올라간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강원 고성에서 소작을 하다 6.25 전쟁 중 한 쪽 다리가 잘리는 비극을 겪었다. 피난처인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 대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6남매의 뒷바라지를 하는 헌신적인 어머니를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가난이 죄는 아니라지만, 가난은 김 대표의 큰 누나와 큰 형이 중학생이 되자마자 생업전선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당시 큰 형님과 큰 누님이 ‘동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자신들의 인생을 포기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철이 들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해서 집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형님은 지금 버스운전을 하시는데 지금도 나는 나의 남은 인생을 모두 형님에게 줘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잠시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불리는 그 시절 김 대표와 같은 절절한 모습은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처럼 느껴졌다. 그런 김 대표에게 의료란 형에게 받은 그 은혜를 갚는 또 하나의 수단이었다.
“세상사람 누구나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산다. 한국에서 의사는 선망의 대상이다. 왜냐면 돈을 잘 벌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에서 의사는 사회봉사자다. 공무원과 의사가 가장 월급이 적다. 사회적 봉사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인재 자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인재들을 사회발전에 제대로 발현시키지 못하는 시스템이 문제다. 의료는 수익창출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국가의사고시에도 나오는 절대명제다. 의료를 상업적 가치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의료에 있어선 국가의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진주의료원을 폐쇄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정말 답답하다.”
그렇다면 그에게 쿠바는 언제 다가왔을까? 김 대표는 부산대 의과대 재학시절 학생회 모임에서 진행한 각 나라 의료제도 비교 스터디에서 처음 쿠바를 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김 대표가 쿠바에 꽂히게 된 것은 바로 체 게바라 평전을 읽으면서부터다.
“한 의사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민중에게 정신적 유산을 줄 수 있는지,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신념에 따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 게바라를 통해 알게 됐다. 쿠바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았다. 비슷한 시기에 식민 지배를 받았고, 결국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를 통해 영감을 받은 그는 졸업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사회에 눈을 돌리게 됐다. 체 게바라처럼 역사와 함께 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들이 대학시절 ‘좋은 의사가 되겠다. 적어도 나만은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 사회의 때가 묻게 되고 직업적 소명이 없어진다. 1999년 부산의료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물만골’ 공동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공동체에서 의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산 물만골은 6.25 당시 형성된 마을이다. 개발붐을 타고 1990년대 철거의 위기에 몰렸지만, 주민들이 함께 돈을 모아 땅을 매입하며 마을을 지켜냈다. 현재 물만골은 친환경적이면서도 마을 주민들의 자치가 가장 높게 실현되는 마을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쿠바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이수 대표ⓒ한쿠바교류협회
부산에 있는 그의 병원은 24시 운영된다. 그렇다고 의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부인과 그가 전부다. 두 명이 24시간 병원을 운영한다는 말에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병원 위가 바로 우리 집이다. 쿠바는 의사집이 곧 병원이다. 그럼 언제든 환자가 찾아와도 따로 당직의사를 두지 않고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쿠바는 의사가 직업적 개념이 아니라 삶이자 생활의 일부로 지역과 맞물려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공공의료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시청보다 많다. 왜 시민들의 돈으로 시청은 화려하게 지으면서 공공의료기관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공공의료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공공의료기관에 사우나나 찜질방 등을 놓고 헬스타운으로 만들어봐라. 시민들이 공공의료기관을 휴게실처럼 여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시민들이 낸 세금이 어떻게 복지로 돌아오는지 피부로 느끼게 해줘야 한다.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가치로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의료는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재료가 아니다. 제가 두 번째로 있었던 병원이 서울에 있는 외국인 무료병원이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다 말렸다. 한 마디로 돈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5년이 넘었는데 잘 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다른 게 아니라 패자부활전이 계속되는 사회를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꿈을 펼 수 없을 때 버팀목이 돼야 한다. 지역에서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망할 병원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이처럼 쿠바를 제집 드나들 듯 하는 데에는 부인의 역할이 가장 컸다. ‘부인께서 응원해 주시는 가보다’라는 부러움 섞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다 이해 못한다. 다만 근근이 용서를 구하고 있다. 비판적 지지자다”였다.
“부산의료원에서 레지던트하던 시절 선배를 따라서 부인이 놀러왔는데, 첫눈에 반했다. 바로 오토바이에 태우고 작업에 들어갔다. 부인도 병원에 오기 전 커다란 흑곰이 나오는 꿈을 꿔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부인이 아니었으면 쿠바와 관련해 이렇게 활동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것 같다.”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답게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다. 바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아시아 분교를 유치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미 쿠바 정부 측에 북한에 이 분교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쿠바 정부 측도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고 설명했다.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쿠바와 주변 국가들이 협력해 북한에 무상의료 외교를 하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형에게 진 마음의 빚을 세계 사람들에게 갚기 위해 김 대표는 그날도 서둘러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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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4 14:31:39 ] 
